2009년 동상 수상작
윤리적 소비 체험 수기 부문
공정무역, 낯설었던 기억을 넘어 다시 만나다.
유광진
“아시아 제3세계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공정한 가격으로 들여온 수공예품입니다. 와서 구경하시고 예쁜 수공예품 구입하세요!”
몇 년 전이었다. 봄의 초입에 시작되는 제법 큰 여성단체 공동행사의 마당에는 ‘공정무역’이라는 낯선 플래카드가 걸쳐지고, 한 여성단체에서 아기자기한 수공예품을 펼쳐놓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내가 속한 단체의 부스가 한가해지자 다른 담당자를 붙여놓고 행사 시작 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그곳, 공정무역 물품 판매부스를 기웃거렸다.
“어서 오세요. 정말 예쁘죠? 제3세계 여성들이 정성들여 만들고, 저희가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들여온 공정무역 물품이에요. 구경하세요.”반갑게 맞이하는 활동가에게 인사하고 찬찬히 물건들을 구경했다. 현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액세서리와 지갑, 스카프 등이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마음에 드는 팔찌를 골라 가격을 물었다. “네, 만 원이에요.”나는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놀라서 골랐던 팔찌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조그맣게 가격표들이 붙어 있는데 한결같이 비싸서, 소심해진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옆에서 열심히 설명해준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미 몇 차례의 동남아시아 여행 경험으로 비슷한 액세서리의 싼 가격에 맛을 들인 내게는 너무나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나는 한창 여행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었는데, 특히 아껴둔 휴가를 이용하여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동남아 여행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왜 그냥 와요? 아까 많이 사고 싶어 했잖아.” 혼자서 부스를 지키고 있던 활동가가 물어본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물건이라 그런지 너무 비싸더라고. 저런 거 태국에서 2~3천 원이면 사는데. 흥정만 잘하면 천 원대에도 살 수 있어.”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나에게 그녀는 웃으며 조언했다.
“응, 맞아요. 우리가 싸게 수입하는 물건들이 대부분 아동들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거래요. 축구공도 그렇고, 우리가 흔히 먹는 꼬치에 끼우는 나무 있죠? 그것도 아이들의 작은 손으로 깎은 거래요. 아마도 저 단체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정당한 노동력으로 만들고 공정한 대가를 지불했겠지요. 그래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거구요.”
“그래, 나도 들어본 것 같아. 그렇지만 너무 비싼 걸. 나같이 가난한 활동가가 지갑을 열기에는……. 공정무역도 좋지만, 어차피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살 수 있겠지 뭐.” 틀린 데 하나 없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양심이 조금 찔렸으나 결국에는 손익계산을 따져가며 ‘나중에 현지 가서 싼 값에 사와야지'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날의 에피소드는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단체에서 알게 된 분을 통해 인도를 몇 달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인도 뱅갈로르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목사님이셨는데, 봉사하러 오는 학생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셨다. 딱히 선교에 뜻이 없는 나는 기도회와 예배 등 종교행사는 몽땅 빠져가면서 그저 낯선 인도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네팔로 넘어가기 전 북인도 여행을 하기 위해 가이드북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게스트하우스 건너편에는 목사님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었는데 적게는 5살, 많게는 12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십여 명 지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끔 게스트하우스에 놀러 와서 귀여움을 떨며 영화를 보여달라고 졸라댔는데, 나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틀어주고 함께 과자를 먹으면서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목사님에게서 전해들은 아이들의 배경은 부모가 있어도 가난해서 자식을 키우지 못해 맡긴 아이, 쓰나미로 전 재산과 가족을 잃은 아이 등 꽤 다양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장난스러운 검은 눈동자의 귀여운 아이들이 그러한 과거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가만히 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축복받은 겁니다. 여기에서 생활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고요. 만일 이곳에 오지 못했다면 벌써부터 노동시장에 뛰어들었을 나이에요. 아니면 수많은 거지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모르고요. 인도에서는 어린이들이 농장 일과 수공업 등에 많이 투입되고 있거든요.
인도의 계급사회에서 가난한 하층 어린이들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원숭이와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요. 새나 개에게는 남은 음식을 던져주면서, 그것을 먹으려는 거지 아이들은 막대기로 쫓아내는 일이 이곳 인도에서는 흔하답니다. 그러니 하루에 1달러도 받지 못하는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지요.”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어렴풋하게 그 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렴한 제3세계 물건들, 어린이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순간, 나 스스로 부끄럽고 미안해지는 마음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얼마만큼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을까. 무심코 사들였던 저렴한 물건들. 그 저렴한 가격에 누가 희생됐을까? 나대신 누가 내주었을까? 가난한 아이일까? 여성일까?
북인도를 여행하고, 네팔을 거쳐 태국, 라오스 등지를 돌아보는 내내 그 생각은 종종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저분하고 작은 꼬마가 내미는 조잡한 물건들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사면서도 마음은 썩 좋지 못했다. 내가 준 1달러로 당장은 가난한 가족이 생계를 꾸릴 수 있으나 근본적인 빈곤을 해결해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몇몇 시민사회단체들이 벌이는 공정무역 커피 선전을 반갑게 읽게 되는 것은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결과이다.
가난한 아이들이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되는 사회, 정당한 노동과 생산이 이루어지고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여 제3세계 생산자들이 지속가능한 생산과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공정무역. 오늘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공정무역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이 한 잔의 커피 소비가 제3세계 농민, 그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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