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동상 수상작
윤리적 소비 체험 수기 부문

나무로 만들지 않은 종이로 세상과 소통하다.
노경아


종이 없는 삶,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고,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어디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종이는 현대인의 삶에서 없어선 안 될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대부분의 종이는 나무로 만든다. 성인 한 사람이 연간 사용하는 종이의 양은 약 153킬로그램, 30년생 원목 3그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국민이 하루에 A4용지 한 장씩만 아껴 써도 하루에 4,500그루를 보존할 수 있을 정도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지구를 살리기 위해, 삼림을 보존하기 위해 종이를 아껴 씁시다!’라는 메시지를 들어왔지만 이 간단한 메시지의 절실함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환경을 생각하기 시작한 어린 디자이너들

대전의 한 작은 학교에서 제품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나는 지난 가을학기에 들은 전공과목에서 16주 동안 ‘Sustainable Design Project’(지속가능한 디자인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가 그러했듯이 모두에게 낯선 개념인 지속가능한 디자인은 정의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는 있지만 기획, 제작, 생산, 사용, 재활용하는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 투입과 유해물질 발생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이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한 학기 내내 학생들이 손쉽게 이용가능하면서도 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아이디어와 제품을 고안해냈다. 학생들이 평소 교내에서 생활할 때 자원이 낭비되는 부분과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제품과 관련 시스템들을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면 대기전력 발생을 경고해주는 콘센트, 음식물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식판, 기숙사 전기 사용량에 반비례하여 조성되는 기부제도 등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았다.

우리 조의 경우, 컴퓨터 사용량이 많은 학교의 특성을 반영하여 누적 사용량을 비교 분석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와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컴퓨터 부품을 디자인하였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의 정의를 내리는 데 3주, 교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낭비 및 환경오염을 리서치하는 데 4주, 개선안을 내고 구체화시키는 데도 7주 가까운 기간이 걸렸다. 밀도 높은 리서치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조원들은 수시로 모여서 연구 경과를 보고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등 하루 평균 7시간에 달하는 미팅을 계속 하였다.

그러는 도중 우리는 점점 성공적인 프로젝트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환경 그 자체를 생각하는 디자이너들로 바뀌어 있었다. 4달 동안 수면과 여가 시간을 포기하고 매달렸던 이 프로젝트의 최종보고 또한 지속가능해야만 하는 것이 의무사항이었다. 최종보고에는 제품을 소개하는 패널과 브로슈어가 포함되었다.

우리 조는 그간의 노력에 박차를 가해 다른 조와 차별화할 수 있는 요인을 찾기 시작하였다. 소비자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으면서도 그 자체로 지속가능한 브로슈어를 제작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특히 인쇄 용지에 포커스를 맞췄다. 샘플로 소량만 제작하지만, 실제로 제품이 상용화된다면 브로슈어 또한 대량으로 생산될 것이기에 친환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삼림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거나, 재활용시 에너지나 화학약품의 투입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과일로 만든 종이? 에콜로지 페이퍼!

인류는 기록하기 위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석판에 기록을 하기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 등으로 도구를 발달시켜왔다. 하지만 이는 제작이 어려워 보편화되지 못하다가 약 1,700년이란 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대중화되었다. 이로써 인류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2초마다 축구장 면적의 원시림을 소비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재의 원시림은 큰 위기를 직면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점에 집중하여 친환경 종이를 찾아나섰고, 에콜로지페이퍼를 만날 수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에게 친숙한 재생용지도 에콜로지페이퍼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재생용지의 경우 수거가 어렵고, 생산 공정시 이물질 제거를 위해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화학약품 처리가 필수적이며 많은 에너지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값도 비싸지고 나무를 덜 소비하는 대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단점도 있다. 이는 우리가 정의했던 ‘지속가능’에 입각하지 않는다는 치명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조사하여 알게 된 것이 목재펄프를 이용하지 않는 비목재지였다. 곡물, 식품 가공시에 발생하는 껍질이나 섬유질을 혼합하여 종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용되는 원료는 게나프, 바가스와 같이 낯선 것들에서부터 대나무, 해초, 볏짚을 비롯하여 콩, 보리, 밀, 커피, 옥수수, 땅콩 등 실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식품과 곡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비목재지의 경우 나무를 소비하지 않는 동시에 식품 가공 후 부산물을 재활용하는 것이라 일석이조의 환경 보존 역할을 한다. 또한 감촉과 질감이 독특해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이 가능하다. 심지어 과일로 만든 종이는 염료의 도움 없이도 과일 천연의 색을 나타내 더욱 매력적이었다. 레몬으로 만든 종이는 연노란색, 블루베리로 만든 종이는 연보라색을 띤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관계로 대량주문만 가능하다는 점. 우리는 소량만 필요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사탕수수종이를 선택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짜낸 후 남은 섬유이자 농산물 잔재인 바가스를 이용하여 만든 종이였는데, 종이를 받아본 우리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차선책이라 생각했던 사탕수수종이는 너무나 고급스러웠고, 동시에 감촉이나 질감이 ‘친환경의 대표주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사탕수수종이 사례를 소개하자 동급생들과 교수님은 호기심을 보였고, 덕분에 수업에서 가장 우수한 사례로 꼽히기도 하였다.

나무로 만들지 않은 종이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인쇄할 일이 매우 많다. 작업하는 도중에 중간점검을 위해 수시로 인쇄를 하고, 최종발표를 위해서는 질 좋은 종이에 완성도 높은 인쇄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비록 에콜로지페이퍼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서 전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실정이지만 디자이너들이 이 부분에 관심을 보인다면 유통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가을 이후, 우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화학약품 처리와 에너지 투입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반 백상지보다는 곡물, 과일 등 식품을 가공한 뒤 남은 부산물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그렇기 때문에 다소 비싸지만 환경을 아낄 수 있는 에콜로지페이퍼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가 그리고 또 우리가 사회에 나가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지금과 같이 친환경용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면, 지구는 조금씩 건강해지지 않을까?

Posted by 사회적경제